내 姓을 계파에 붙이지 말라 2015.05.26
자금·공천권·선거기술 가진 보스 없어졌는데도
정치 私人化 여전한 건 한국에만 남은 病理 현상
정치 卒兵化 개선하려면 대통령이 먼저 '脫朴' 해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3일 자신의 6주기 추도식을 하늘에서 내려다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자살하기 전 "나를 잊어달라"고 했는데도 그처럼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뿌듯하게 생각했을까? 자신의 아들이 인사말에서 집권 세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싸잡아서 조롱하듯 비난한 것을 대견하게 여겼을까? 자신의 성(姓)을 딴 '친노(親盧)'라는 정치 세력이 이날 생일 만난 듯 기승하며 이 사람 치고 저 사람에게 물 뿌리는 것을 고소하게 생각했을까? 무엇보다 '친노'가 한국 정치의 주요 변수로 성장한 것에 감개무량했을까?
아마도 그가 '잊힌' 정치인이나 '버림받은'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며 새삼 안도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지금과 같은 폐쇄적·배타적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느냐는 평가는 이념적 성향에 따라 갈리지만 적어도 자기 성격이 강하고 자존심이 센 분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정치인 노무현'이었으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죽음으로 몬 것은 '대통령 노무현'의 자존심·책임감·수치심이었을 것이다.
그의 최측근이었으며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이날 그것을 이렇게 확인했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분열의 수단으로 삼지 말라"며 "그분의 이름으로 (당의) 패권을 추구한다면 그분이 하늘에서 노(怒)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반대로 가고 있다. 지금 야당의 정치는 '친노' '비(非)노' '반(反)노'등으로 엉켜 과거보다 더 맹렬히 돌아가고 있다. '노무현' 없이는 새정치민주연합을 논할 수 없고 우리 정치 전반을 설명할 수도 없게끔 됐다. 친노라는 정치 세력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는 이념지향적 동지들이라기보다 문 대표의 표현처럼 당의 '패권'을 추구하고 노무현을 정치 마케팅 하는 집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친(親)아무개'는 야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누리당에는 '친박(親朴)'이 있다. 억세기로 하면 때로 야당의 친노보다 더 완고하고 철통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박'은 더 나아가 비박·반박·복박·탈박 등 다채로운 박(朴)자 돌림을 양산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친이(親李)'가 주류 행세를 했고, 소수지만 지금도 남아있다.
정당에 계파가 존재해온 것은 오래된 얘기다. 오늘날 우리 정치의 계파주의 붕당정치는 몇백년 전 조선 시대의 사색당쟁(四色黨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패거리 정치, 즉 끼리끼리 밀어주고 반대파 제거하기는 우리 역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래다. 그것이 현대에 와서 특히 야당의 계파에 전수돼 신파·구파가 등장하더니 정치 지도자의 아호(진산계·운경계)가 계파의 문패가 됐다. 나중에는 보스가 사는 동네(상도동·동교동)로 갈리고, 마침내는 친박·친노처럼 이름에 따라붙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의 계파가 정책과 이념 등 공적(公的) 영역에서 사적(私的) 영역으로 추락했다고 할 수 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전 세계에서 정치의 계파에 정치인의 성(姓)이 붙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일본도 거물 정치인이 거느리는 계파 조직이 있었지만 고이즈미 정권 때부터 사라졌다고 하니 정치 조직의 사인화(私人化)는 이제 한국만의 한류(韓流)로 남아 있는 셈이다.
당초 계파가 가능했던 것은 그 조직을 이끄는 정치인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2000년대까지도 계파의 '왕초'는 첫째 정치자금을 알선·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하고, 둘째 공천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셋째 당선시켜 줄(?) 영향력과 선거 기술이 있어야 했다. 오늘날 이 세 가지를 줄 수 있는 보스는 없다. 정치 일선에서 퇴장했거나 작고한 정치인을 이름으로 추종하는 계파는 더더욱 존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친노·친박이 존재하고 더 나아가 왕성하기까지 한 것은 우리 시대의 불가사의다. 정치 졸병화(卒兵化), 아니면 집단 안도감이 극에 달한 시대적 병리현상 때문이리라.
이런 정치 후진적 요소와 시대착오적 요인들을 개선하는 방법은 그 이름을 내주거나 빌려주고 있는 당사자들이 과감히 그 이름을 거두는 것이다. 지켜질는지는 몰라도 문재인 대표는 노무현의 이름을 딴 패권주의를 타파하겠다고 약속했다. 새누리당에도 그런 움직임은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먼저 친박의 박(朴)자를 거두어들이는 용단을 보였으면 한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당내 계파의 보스일 수 없다. 그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대한민국이라는 조직의 수장이어야 한다. 그가 명실상부하게 '탈박(脫朴)'을 선언하면 그 효과는 대단히 클 것이며, 그것은 '친노·비노 프레임으로 재미 보려는 사람'(문 대표의 말)들에게도 큰 타격을 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추도식에서 현 난국을 보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을까 아니면 당내 계파싸움에 흐뭇해했을까? 우리는 그가 원한다고 해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그를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를 '친노 원조(元祖) 노무현'으로는 잊어주고 싶다. 그 역시 그것을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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