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칼럼·조선일보/2015 년도

前 정권 손보기(2015.04.14 )

푸른솔1 2015. 10. 9. 15:24

前 정권 손보기      2015.04.14

집권 세력이 前정권 非理로 '상대적 청렴성' 과시하는 한가한 정치 게임할 때인가
'휴화산' 政治資金 문제를 부각하는 기회주의 처사는 法과 政治 영역 혼돈케 해

정치는 돈을 먹고 산다. 돈 없이는 정치할 수 없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그렇다. 그러면 돈은 어디서 나오나? 세 군데뿐이다. 자기 돈이거나 나랏돈이거나 남의 돈이다. 자기 돈으로 정치할 수 있는 사람은 한두 재벌이나 자산가뿐이다. 나랏돈은 곧 국민 세금이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마지막 조달처는 남이다. 곧 개인 후원이거나 기업이다. 후원금은 '새 발의 피'고 결국 큰 물줄기는 기업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는 기업의 돈으로 운영된다는 결론이다. 대통령이건 여야건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기업이 자선가도 아니고 돈이 화수분도 아니다. 기업의 돈은 공짜가 아니다. 정치의 입장에서는 기업이 대승적 차원에서 또는 기업할 수 있는 환경적 비용으로 돈을 내기 바라지만(그것을 '정치자금'이라고 부른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언젠가는 반대급부가 있는 보험의 성격임을 강조한다. 이런 상호 보완적이면서 동시에 대립적인 관계는 평상시는 밑으로 침전해 있지만 때로 화산(火山)처럼 분출돼 마그마를 쏟아낸다.

'성완종 사건'은 그 화산 중의 하나다. 과거에 '차떼기' 사건도 있었고 간헐적으로 대선 자금 수사가 이어졌지만 그때뿐이고 정치와 돈의 관계는 숙명처럼 붙어 다녔다. 아무리 파장이 크고 여러 사람이 다쳐도 정치자금은 개선되지 않았고, 또 개선될 수도 없었다. 때때로 터졌다가 봉합되고 또 터졌다가 다시 아물기를 끝없이 반복했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야는 지금 '성완종 리스트'를 놓고 서로를 물고 들어가려고 야단이지만 정치권 전반으로 보면 아마도 안 드러나고 넘어간 케이스가 몇 배 더 많을 것이고 해당 정치인은 '재수 없어' 도마 위에 오른다고 한숨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전제 아래 이번 성완종 사건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번 사건은 집권 세력 스스로가 촉발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번 사건의 출발점은 전(前) 정권을 손보는 차원의 기획적 사정(司正) 수사였다. 성완종 회장이 자살 전날 기자회견을 통해 "나는 MB 사람이 아니다. 나는 박근혜 당선을 도왔다"고 말한 것은 그가 이번 수사를 MB 정권의 비리를 타깃으로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자원 외교를 빌미로 MB 정권을 잡으려다가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 3명과 집권당 실세들이 도마 위에 오르는 난감한 제 발등 찍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정치의 고질병 같은 전(前) 정권 손보기 또는 정치적 앙갚음이다. 공화국 건국 이래 70여년간 권력에서 물러난 후 제대로 살아남은 대통령은 거의 없었다. 이념으로 죽이고, 부정(不正)으로 매도하고,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위해 상대방을 감옥 보내고, 개인적 원한으로 닦달하는 등 이 나라의 정권 교체사(史)는 회색과 검은색으로 얼룩져 있다. 심지어는 정권을 차지한 승자가 선거의 패자에게까지 보복의 칼질을 했던 것이 우리 정치사다. 결국은 박 정권도 세월이 지나면 '피의자 입장'에 설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치에서 가정(假定)은 무의미하다지만 박정희가 이승만을 건국의 영웅으로 대접했더라면,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굳이 감옥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무엇보다 이명박이 노무현을 모욕적으로 몰아세우는 검찰을 견제했더라면 지금의 '친노(親盧)'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정치적 대결 구도는 지금보다 한결 완화됐을지도 모른다.

심각한 사태는 이제부터다. 리스트에 올라 있는 정치인들은 완강히 부인하고 있어 증거가 없는 한 공방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여론은 "그럴 줄 알았다"며 정치 불신을 더욱 키워 갈 것이다. 성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받았으면 자기가 먹었느냐 선거에 썼느냐가 중요한 관점이다. 당사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그 돈을 당이나 선거에 썼다고 한다면 대선 불법 자금 수사는 불가피할 것이고 그것은 가뜩이나 집권 후반부에 접어든 박 정권의 레임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이래저래 정치는 지리멸렬해질 것이다. 외교·국방의 난제(難題)를 안고 경제의 침체에서 벗어나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우리 정치가 표류하는 사태가 온다면 이야말로 국가적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불법과 비리가 있으면 지난 권력이나 죽은 권력이나 살아 있는 권력이라도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은 법치국가의 당연한 도리다. 하지만 한 나라의 집권 세력이라면 지금이 과거 정권의 '비리'(그것도 확인된 것도 아닌)를 캐서 그것으로 자신들의 '깨끗함'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는 정치적 게임을 해도 될 만큼 한가한 상황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정치와 돈의 관계를 혁명적 차원으로 혁신하는 특단의 조치라면 몰라도 어차피 휴화산 같은 정치자금 문제를 부각하는 기회성 처사는 결국 법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을 혼돈하는 우(愚)를 범하게 될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렸을 당시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제럴드 포드는 자신의 다음번 대선 출마를 포기하고 닉슨을 사면했다. 포드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미국을 워터게이트 소용돌이에서 구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