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칼럼·조선일보/2015 년도

"내 무덤에도 침을 뱉어라"(2015.05.12)

푸른솔1 2015. 10. 9. 15:29

"내 무덤에도 침을 뱉어라"   2015.05.12

국회선진화法에 잡힌 靑·與, 공무원연금 개혁 무책임 野… 돌파구 열 책임은 대통령 몫
下命 대신 국민과 소통하고 포퓰리즘 떨치고 蕩平策 펴 아버지에게 진 빚 갚아야

나라 전체가 마치 국회선진화법에 걸려 있는 형국이다. 아무리 다수당이 있고 국민이 직접 뽑은 정권이 있어도 소수당인 야당과 반(反)정부 세력, 반체제 세력이 붙들고 늘어지면 한 치도 못 나아가는 것이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이럴 것이면 왜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선거를 하고 대통령과 다수당을 뽑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법은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18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주도로 만들어졌다. 지금 그 법의 피해자는 박 대통령과 집권 새누리당이고, 최대 피해자는 대한민국 자체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냥 개탄만 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박 대통령은 '정치 게임'과 '지시'만 하지 말고 국민과 마주해야 한다. 나라 사정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박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지도자는 결과에 책임질 뿐이다. 정치가 이 모양이고 경제가 막막하고 사회 개혁이 제자리걸음인 데는 대통령의 지도력·통치력·친화력 부재도 한몫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제 남은 기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냥 모든 것이 아니라 '달라진'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한다. 더 이상 물러갈 데도 없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무엇이 두려운가?

지혜 있는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거기에 국론이 모아져 법과 절차에 따라 운용되는 것이 민주국가의 전범(典範)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그럴 형편이 못 된다. 지혜는 간 데 없고 국론은 갈가리 찢기고 법과 질서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 정치권은 "청와대가 뭔데 대통령이 좌지우지하려 드느냐"는 것이고, 청와대는 논리와 지혜는 없이 권위로만 상대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이런 여건에서는 정상적인 정치가 가동하지 않는다.

공무원연금 개혁 문제를 놓고 남 탓하고 발뺌하는 여당을 보면 무슨 국정 책임이 있는지 한심하다. 고개를 돌려 야당을 보면 더욱 '아니올시다'다. 공개회의에서 치고받고 노래 부르고 낄낄대는 야당이 정권을 잡았다가는 나라가 개그 콘서트장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알았다' '몰랐다'로 티격태격하는 대통령과 청와대의 행태도 크게 실망스럽다.

지금 다수 국민은 무언가 어디선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나마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에게 변화의 시발을 기대하고 있다. 다수 국민은 박 대통령이 여기저기 행사에 가서 써놓은 원고 읽고 사진 찍고 지시하는 패턴에 더 이상 감동받지 않는다. 몸이 아플 정도로 강행군하며 외국을 다녀도 전처럼 애처롭게 여기지도 않는다. 국민이 자기에게 주문하고 싶은 말을 내각이나 비서관에게 하명(下命)하는 장면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앞으로 남은 2년 남짓한 기간이 지난 2년 국정 패턴의 연장이고 반복이라면 박 대통령의 치세(治世)는 암울하다.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상(像)은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토론하고 심사숙고하고, 일단 결정을 내리면 국민과 소통하며 파격적 행보로 밀고 나가는 강단 있는 지도자다.

박 대통령은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4대 개혁 과제 중 첫째인 연금 개혁이 지지부진한 지금 '부정·비리 척결'까지 더 얹은 숙제의 더미에서 헤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약점을 본 야권은 갈수록 브레이크 밟는 데에 재미를 붙일 것이고, 아직 총리도 고르지 못한 상황에서 국회에 복귀하는 장관 6~7명의 뒷자리를 메우다 보면 내년 총선으로 해가 가고 곧바로 대선이다. 대선 가도(街道)에서 대통령의 존재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과거 예(例)에 비추어 여당이 대통령의 탈당을 들고 나온 데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정치에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정치권에 놀아나지 않고 국민과의 직접 통로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여당을 추궁하고 야당을 면박하며 거기에 끼어드는 '삼각(三角) 구도 정치'로는 이미 대통령을 업신여기는 길로 접어든 정치권을 휘어잡을 수 없다. 되도록 국회와 싸우는 데 시간과 노력을 허송하지 않고 대통령에게 허용된 법과 절차의 테두리 안에서 우회할 수 있는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리고 그것을 직접 국민에게 설명하고 여론을 모아가는 노력으로 남은 기간을 활용하는 일대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거듭 묻고 싶은 것은 박 대통령은 임기 중 어떤 업적을 달성할 것인가다. 더 나아가 역사에 어떤 족적을 남기고 싶은가이다.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왔고 여기까지 올려준 것은 어느 부분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이다. 박 대통령은 그만큼 아버지에게 빚이 있다. 그것을 갚아야 한다. 아버지의 절반이라도 닮으라는 것이다. 국민이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속마음을 읽어내고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으며 인사 탕평책을 쓰면 국민은 호응할 수 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던 아버지의 자세로 자신의 진로를 설정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되고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반환점을 통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