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칼럼·조선일보/2012 년도

어디 이런 대통령감 없나요?( 2012.07.23 )

푸른솔1 2012. 11. 13. 11:40

근대화·산업화·민주화 넘은 뒤 중대한 고비서 방향 잃은 우리
포퓰리즘 젖은 대선 후보들 유권자에 '주겠다'는 선심뿐
철학과 신념으로 국민 이끌고 미래 위한 땀 요구할 후보 절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지난 6월 재정 위기에 빠진 유럽을 돌아본 뒤, 범(汎)세계적인 리더십 결핍 현상을 지적하는 글을 썼다. 그는 '왜 세계에는 우리 시대의 도전에 맞서도록 그들 국민을 고무하고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이렇게도 없는 것일까'라고 한탄하면서 지도자들이 SNS 등으로 너무 많은 사람의 '소리'를 듣다 보니 결국 '자신(自身)'은 없어지고 그 '소리'에 갇히고 만다고 했다. 그는 지도자들이 여론조사에 함몰되고 블로그를 좇으며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난 것들을 챙기다 보면 국민이 가야 할 길보다 국민이 당장 원하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고 했다. "모두가 '팔로잉'하면 '리딩'은 누가 하나?"라는 것이다. 이 글에 인용된 전 호주 외무장관 다우너는 "많은 지도자가 전례 없는 집중적인 대중의 감시와 검열의 도마 위에 올라있다. 때로 대중의 조롱과 상호 교류는 지도자들이 합리적이고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더 어렵게 한다"고 했다.

이런 현상은 구미(歐美)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특히 대통령 선거를 5개월 남짓 앞둔 시점에서 더욱 돋보이고 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 정권을 차지하겠다는 정당들 그리고 권력에 붙어 한 세월 잡아보겠다는 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선심(善心)을 찾아나서고 지금 당장 유권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데만 혈안이 되고 있다. 이들에게서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고, 10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10년의 대계(大計)만이라도 세워보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여기까지 정말 힘들게 왔다.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된 우리는 식민 속국(屬國), 남북 분단,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불과 60여년이라는 단기간에 선진화의 최단 코스를 달려왔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급성장의 여파로 피로감에 절어있는지 모른다. 성장은 둔화되고 부(富)의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고 국민적 이질감은 더욱 굳어지고 있다. 유럽발(發) 경제 위기는 수출 급감, 생산 위축, 중소기업 도산, 가계 대란, 대량 실업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동력(動力)은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몇 십리도 부지런히 걸었던 우리는 한번 자동차의 '맛'을 본 뒤 단 몇 백미터도 걷기 싫어하고 어제 달게 먹었던 '보리밥'을 더 이상 끼니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는 다 같이 못살았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는 옆집이 너무 잘사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의 돈을 '장롱 속에 쌓아둔 돈'이라며 부도덕시하고, 나랏돈(세금)을 마치 제 돈인 것처럼 당당히 요구하고 있다. '나라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네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라'고 했던 케네디의 명구(名句)를 빌리자면 요즘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내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 전에 나라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대답하라'고 다그치는 형국이다.

지금은 중대한 고비다. 식민화,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의 고비를 넘어온 우리는 여기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가야 할지, 어떤 이념적 지표 아래 나라의 동력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지 헤매고 있다. 우리의 강점이었던 도덕적·윤리적 덕목들은 오히려 우리의 취약점이 되고 있고, 동방예의지국은 동방무례지국의 오명으로 멍들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애국심이다. '애국심' 하면 흔히 퇴행적·복고적 사고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애국심을 자기가 사는 환경에 대한 자부심이라고 하면 어떨까? 애국심을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애국심을 오늘을 위해 재화를 빌리고 써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땀 흘려 일하고 저축하고 투자하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애국심을 공동체를 위해 자기보다 못한 남에게 조금 양보하고 부담을 나누어 지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애국심이란 법과 질서를 지키고 예의와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는 이런 애국심을 내건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면 한다. 구태의연(舊態依然)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구태'가 절실히 요구된다. 온통 포퓰리즘에 중독돼 '주겠다'는 후보가 천지인 판에 애국심을 앞세워 자제와 헌신을 요구하는 후보는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에게 무엇을 주겠다고 하기보다 무엇을 할 것을 요구하는 그런 건방진(?) 대통령 후보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 남들 다 따라 하는, 그래서 여론의 꼭두각시로 행세하는 줏대 없는 다중의 시녀(侍女)가 되기보다 자신의 철학과 신념과 의지에 따라 과감히 결정하고 국민에게 자신을 따라줄 것을 요구하는, 그런 선봉이기를 자처하는 후보에게 표를 주고 싶다. 2012.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