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칼럼·조선일보/2015 년도

李 총리 인준의 敗者는 언론(2015.02.17)

푸른솔1 2015. 3. 13. 14:44

李 총리 인준의 敗者는 언론                      2015.02.17

독재시절 권력비판 고민이 '올바로 쓰느냐'로 바뀌
어部數·광고·데모 신경 쓰고 '제5府' SNS와 경쟁 시대
'역사의 草案' 쓰고 있음을 언론 조롱자들에게 보여야


이완구씨가 마침내 총리로 인준됐다. 인준 싸움에서 그가 승자라면 패자(敗者)는 언론이다. 그가 청문 과정에서 기자들에게 했다는 발언은 이 땅의 기자들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했다. 우리는 이런 조롱조의 소리를 들을 만큼 형편없는 기자들이었나. 대한민국 언론이 광복 후 70여년 동안 산업화, 민주화, 좌우 대립의 고초를 겪으면서 쌓아온 것이 고작 이 정도인가.

그가 언론인들을 대학 총장과 교수로 만들어줬고 자기에게 불리한 패널을 빼달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것까지는 자기 과시라고 하자. 견딜 수 없는 모욕은 자기가 신문·방송사 윗선에게 얘기해 기사를 빼게 해놓고 그 기사를 쓴 기자를 '자기 죽는 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며 그러고도 모자라 "이것들 웃기는 놈들 아닌가"라고 힐난하는 대목이다. "너희 기자들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내가 너희 경영진, 너희 선배(데스크)에게 부탁하면 너희만 죽는다"며 일선 기자를 모욕한 것이다.

이런 모욕적 언사를 듣고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한 '우리'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완구씨의 발언을 부각하며 고소하다는 듯이 물고 늘어지는 야권(크게는 정치권)의 공격에서는 '말리는 시누이' 냄새가 난다. 이완구도 당하고 언론도 당해보라는 것이다. 꽃놀이패가 따로 없다.

오늘날 언론이 이런 처우를 당하는 것은 언론 책임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 언론 환경은 재정적으로 대단히 취약했고, 그런 이유로 정치적으로도 온전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구차하게 상대적 논리를 펴자면 그래도 언론은 정치보다는 썩지 않았다고 자부해왔다.

권위주의와 독재가 지배했던 지난 세월 올바른 언론의 기준은 권력과 맺은 관계에서 설정됐다. 권력과 유착하지 않고 권력에 저항하는 언론이 언론다운 언론으로 대접받아 왔다. 언론 자유는 권력의 비리나 집권층의 오도된 행동을 보도하느냐 못 하느냐에서 갈렸고, 언론의 존재 이유는 권력 비판과 민권(民權) 선양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가고 있다. 이제 대통령이 두려워서, 총리에게 아부해서, 정치인에게 3만원짜리 밥 얻어먹으려고, 교수 한자리 얻어 하겠다고 기사 못 쓰고 기사 빼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완구씨의 사고는 구(舊)시대에 정지돼 있다. 그리고 이 총리의 그런 언론관 수준으로는 어려운 난국을 돌파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 우리 언론이 당면한 문제는 그런 권력 저항적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쓰느냐, 못 쓰느냐'로 고심하던 독재·권위주의 시대를 넘어 '올바르게 쓰느냐, 왜곡·오도하느냐'로 고민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과거 신문·방송이 제4부(府) 권력이라고 지칭됐다면 SNS로 통칭되는 인터넷 언론은 가히 '제5부의 권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NS가 세상을 보는 시각의 기준과 배경을 이루고 이른바 '여론'을 주도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이것은 거대한 '권력'으로 둔갑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력은 때로 어떤 목적에 따라 조직화되는 경향마저 있다.

오늘날 신문·방송은 바로 이 '여론'이랄까 포퓰리즘이랄까 하는 것과 겨루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언론은 누군가가 또는 어디에선가 조성한 여론의 눈치를 보게끔 된 것이다. 대북(對北), 세월호, 땅콩 회항, 위안부, 복지와 세금, 연금, 노령화 등 민감한 문제가 세론(世論)을 타고 분위기를 만들면 언론은 그 눈치를 보며 발언 수위를 조절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거슬러서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안 한다. 아니 못 한다. 부수가 떨어질까 봐, 데모대(隊)가 몰려올까 봐, 광고에 부담 줄까 봐, 조직 내에서 위(上)에 찍힐까 봐 쓸 것을 못 쓰는 경향이 있다. 반대 의사 표시가 허용되지 않는 여론 정치에 말리는 것이다.

포퓰리즘 말고도 언론의 결정적 위해 요소는 '거짓 보도'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만 집착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외면하며 국민을 오도하는 '거짓말 언론'은 어쩌면 '못 쓰는 언론' '잘못 쓰는 언론'보다 더 해악적이다. 아베 일본 총리의 역사 인식에 동조하는 일본 우익 언론은 바로 그런 본보기다. 최근 미국 전체 시청률 1위를 달리던 NBC 뉴스 앵커 브라이언 윌리엄스가 이라크전(戰) 취재, 뉴올리언스의 '카트리나' 수해 취재 때 한 '거짓 보도'로 6개월간 정직당하며 하루아침에 추락한 케이스는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다.

저널리즘에 관한 유명한 격언이 있다. '저널리즘은 역사의 초안(草案)(first draft of history)'이라는 것이다. 언론은 역사를 써나가는 데 기초가 되는 기록을 담당하는 직업이다. 가끔 기자를 조롱하는 사람들은 저널리즘을 '너절리즘'이라고 비꼬기 좋아한다. 우리는 이 총리처럼 기자를 '너절한' 직종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역사의 초안을 담당한 저널리스트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것은 쓸 것을 쓰는 것, 사실에 충실한 자세, 옳은 데에서 타협하지 않는 용기를 말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