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칼럼·조선일보/2013 년도

'댓글'의 轉禍爲福(전화위복)( 2013.07.02 )

푸른솔1 2013. 7. 24. 16:11

'댓글'의 轉禍爲福(전화위복)                  2013.07.02

美 CIA·NSA, 도·감청 폭로 논쟁 중… 韓 국정원, 댓글 또닥거리다 들통
선거개입 여부 떠나 정보기관 망신
과거엔 사람 잡아가고 고문하더니 요즘은 댓글 달며 잡스러운 일… 정보기구 본연의 모습 바로잡아야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보자. 미국 CIA 직원들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롬니 공화당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인터넷에 띄우고 있는 장면을 말이다. 또는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이 야당 후보들을 반대하는 댓글을 올리는 경우를 말이다. 우리 검찰 수사 발표를 보면 우리 국정원은 지난 대선에서 그랬다고 한다. 국정원 요원들이 '원세훈 원장의 지시에 따라' 댓글 73건, 찬반 표시 1281건을 달아 '불법 선거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국정원이 선거 개입을 했다고 해서가 아니다. 일국의 최고 정보 기구 요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어느 후보는 좋고, 어느 후보는 나쁘고' 등등의 댓글이나 쓰고 있었다는 것이 정말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다. 원세훈씨의 '죄'가 있다면 국정원이 대북(對北), 대중(對中), 대미(對美)의 넓고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놀기는커녕 겨우 인터넷에 댓글이나 또닥거리는 것으로 소일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원세훈씨는 '유죄'다.

그것을 지적하기는커녕 국정원이 그 '짓'을 하지 않았으면 대선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떠드는 야당, 과거 좌파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온갖 천박한 발언과 저자세를 보인 것은 별것 아니고 국정원 댓글이 무슨 대단한 국기 문란이나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좌파의 기회주의는 어쩌면 국정원 댓글보다 더 희극적이고 동시에 비극적이다.

한국이 댓글로 국정조사를 벌이겠다고 떠드는 그 시점에 미국에서는 전직 CIA 직원이었으며 현직 NSA(국가안보국) 직원인 스노든의 감청·도청 폭로 사건을 둘러싸고 안보 논쟁이 뜨겁다. 미국에 침투하는 테러 분자를 잡는 데 개인 정보 사찰은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개인이 보호를 받을 권리, 국민의 알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주장이 대립해서 논쟁을 벌이는 미국과, 댓글 몇 개로 여야가 시급한 민생·경제 현안은 제쳐놓고 입에 거품을 품고 정치적 소모전을 벌이는 한국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것도 부끄럽고 창피하고 짜증 나는 일이다.

60~80년대 중앙정보부의 사찰에 직·간접으로 시달렸던 기억을 가진 기자들에게 정보부의 후신인 국정원이 검찰의 압수 수색을 받고, 원장이 기소되는가 하면 국회의 국정조사까지 받게 된 오늘의 사태는 가히 격세(隔世)의 느낌을 갖게 한다. 정권에 불리한 기사, 사회 밑바닥의 현실을 적시하는 기사를 쓴 기자는 '불온'의 낙인과 함께 정보부 수사국이 있던 '남산(南山)'에 끌려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악명 높은 '지하실'에서 때리고, 잠 안 재우고, 모욕 주고, 때로는 회유하기도 하며 '북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그 기사를 썼다는 터무니없는 자술서를 강요했다.

그런 정보부가 이제 무릎을 꿇리는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는 기자의 마음은 착잡하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면서 우리 민주주의가 비교적 짧은 시일에 괄목할 만큼 많이 진척됐다는 안도감을 갖는다. 야당이 호들갑을 떠는 것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과거 무소불위의 권력도 결국은 이런 계기로 과거의 악몽을 지워나가는구나 하는 그런 안도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정원에 대한 채찍이 자칫 국정원 본래 업무인 대외 정보 특히 대북 정보의 수집·분석 그리고 공작적 활동까지 위축시키는 사태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좌파는 아주 신이 났다. 대역무도한 죄라도 저질렀다는 듯이 국정원을 무릎 꿇리는 일에 열광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가 할 일이 있다. 박 대통령은 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자리 잡는 대로 또 시급한 외교적 발판을 닦는 대로 우선적으로 국가 최고 정보 기구의 기능과 역할을 혁명적으로 개선·개편하는 일에 착수하기 바란다. 일반 국민에게 지금까지 정보부·안기부·국정원은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최우선시하는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권의 안보 기구, 집권 세력의 울타리 기능 쪽이 더 강한 것으로 인식돼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 잡아가고, 때리고, 고문하고, 근자에 와서는 남의 뒷조사나 하고 댓글이나 다는 등 잡스러운 일을 하는, 그러면서도 정작 북한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깜깜인 그런 맹랑한 곳으로 인식돼 있다.

이제 우리도 과거 무소불위의 정보부를 법(法) 앞에 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민주적·법적·제도적 장치를 활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면 국정원도 이제는 환골탈태해야 살아남는다. 그것이 '박근혜 혁명'의 한 주요 부분이 되기를 기대한다. 1961년 아버지(박정희)가 만든 정보부의 일탈을 40년 후에 딸이 바로잡는 것은 의무이기도 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댓글'을 전화위복으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