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와 마주 앉는 일부터 2012.12.24
대선 때마다 나라 분열되고 서로 매도하는 일 반복돼서야
선거는 선택의 일상적 행사… '죽고 살기 한판' 전쟁은 곤란
박 당선인, 앞으로 5년 동안 분열·적대감 치유에 힘써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선거 때, 특히 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지지자와 반대자들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 걸다시피 전력투구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마음이 살벌해지고 전쟁 치르는 듯이 비정상이 되곤 했던 것이 지난날의 표심(票心) 상태였다. 하지만 12·19 대선은 놀라울 정도로 선거 후유증이 극심하다. 이번까지 일곱 번의 대선을 취재했지만 과거 민주화 투쟁 시기의 대선 때도 국민이 이번처럼 극단적으로 갈린 적은 없었다.
선거가 끝난 후 각종 언론 매체에 등장하는 지지자와 반대자들, 특히 야권 지지자들의 발언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욕설들이고 이에 대한 '이긴 자'들의 대응 역시 편 가르기와 패대기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선거 전날 문재인 후보가 앞서기 시작했다는 일부 여론조사 결과를 접한 한 보수 인사의 반응은 "이제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살지" "이민이라도 가야겠다"는 무거운 탄식이었다. 결과가 야당 패배로 밝혀진 뒤 한 소설가는 "절망은 독재자에게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웃에게서 본다" "한반도, 이 폐허를 바라보고 서 있다"며 심리적 공황 상태를 보였다. 이제는 이민 가야겠다는 소리가 좌파 쪽에서 나온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박근혜 지지층은 문의 집권을 '친북(親北)'으로, 문 지지층은 박 치하(治下)를 '나치' '유신'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인터넷에서 노인들의 지하철 무임승차를 폐지하라는 등 젊은 층의 악담과 젊은 세대를 비판하는 노·장년층의 비아냥이 여과 없이 교환되고 있다.
정치 선진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에게 선거는 일상적인 행사다. 선거는 '선택'의 수단일 뿐 죽고 사는 갈림길이 아니다. 출마자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뿐이지 그에게 열광하거나 그를 비하하는 등 선거에 함몰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거가 세상을 통째로 바꾼다는 인식이 없고, 대립이 있었다 해도 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일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선거를, 또는 우리 지도자를 뽑는 행사를 일상화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온 나라가 분열되고 선거 후에까지 국민이 서로를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매도하는 일이 반복돼서는 우리는 선거를 할 자격이 없다.
물론 우리에게는 남들보다 넘어야 할 산(山)이 더 있다. 분단이 그렇다. 땅이 남북으로 갈린 데다 이념마저 극렬하게 맞서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구멍 난 곳이 널려 있다. 분배 구조 개선의 문제가 그중 하나다. 가족의 이완 문제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급속한 노령화 문제는 인구구조를 변경시키면서 사회의 심각한 갈등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요인들이 선거 때마다 분출돼 감정을 격화시키고 이성을 덮어 분별력을 잃게 하는 계절병(病)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죽고 살기 한판' 식(式)의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다. 이것은 국민적 자해(自害) 행위다.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선거에서 이긴 박근혜 당선인이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은 이 같은 분열과 적대감의 치유이다. 자신이 승자로 부상한 바로 그 선거로 인해 환호하는 사람과 거의 같은 숫자의 사람이 다치고 아파하고 탄식하고 저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박 당선인은 '돌아선 마음'들을 돌려세우는 데 5년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어떤 정책보다 중요하다. 먼저 자신을 향해 악담하거나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제2의 촛불'로 가는 길을 막는 일이다. 선거에 진 사람이 승자에게 승복하는 것을 미덕으로 훈련받아온 우리에게 지고도 악을 쓰는 사람들(비록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까지 대등하게 대우하라는 것은 일견 이치에 어긋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저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등을 돌리거나 마음을 닫은 사람이 전체의 48%일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단순히 '미덕'을 이유로 방치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30세를 넘지 않았을, 그리고 아마도 박근혜 후보를 찍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배우·탤런트 유아인씨가 인터넷 매체 '뉴스엔'에 올린 글 중 몇 마디를 옮겨본다. '진보 인사의 나치 드립이나 보수 파티 타임의 메롱질은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국민의 환멸을 다시 초래할 뿐이다. 대통령 후보는 선택할 수 있어도 대통령을 선택적으로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분개하든 환영하든 진영 논리나 윤리적 선악 구조의 이분법이 아니라 국민 각자의 역사의식과 도덕적 잣대 그리고 합리적 사고로 오늘을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차기 정부의 실정(失政)을 염려하되 실정을 염원하는 코미디는 없어야 한다. (차기 정부가) 제대로 일해주기를 바라는 게 우선 아닌가. 그것이 국가를 위함이다. 과거를 반성하며 앞날로 가야 한다. 그것이 진보다.' '(당선인이) 약속은 꼭 지킨다니 그 약속의 책임을 믿음이란 무기로 그에게 강요할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응원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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