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칼럼·조선일보/2009 년도

우리에게 6자회담은 무엇인가(2009.03.15 )

푸른솔1 2012. 12. 4. 17:55

우리에게 6자회담은 무엇인가       2009.03.15

마지노선은 있다
북핵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 어떤 타협에도 동의할 수 없다
제거대가를 떠맡는 것도…

북한김정일 집단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그렇게 원하면서, 그 개선의 기회가 왔는데 그것을 여지없이 걷어차는 북한 당국의 처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가능한 해설은 세 가지다. 아주 머리가 나쁘거나, 아니면 고도의 전략을 숨긴 것이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북한 내부의 사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당 정부가 출범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일단 북한 등에 대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오바마는 취임 초 '오바마-바이든 플랜'에서 우방과 적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과 협상테이블에 나설 용의를 천명한 바 있다. 이미 8년 전 클린턴 정부의 말기에 클린턴의 방북을 포함해 미·북 관계개선에 앞장섰던 한반도 전문가들이 다시 오바마의 진영에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오바마 정부의 연성(軟性)접근법은 분명했다. 국무부의 아인혼, 포니만, 보즈워스, 백악관의 세이모어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미국이 북한을 더 빨리 다스리지 못해 북한으로 하여금 핵개발의 시간만 벌어준 꼴이라는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미국에다 대고 북한은 뒤통수를 쳤다. 상대방의 새 정부가 호의적 제스처를 취했으면 그 귀추를 보면서 상응하는 대응을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대접(?)이며 상식이다. 한국을 경유해 북한행(行)을 기다리고 있던 보즈워스 특사의 방북도 보기 좋게 무산시켰다. 그들이 발사 예정인 미사일 (또는 인공위성 발사체)을 요격하면 전쟁으로 간주하겠다며 으름장까지 놓았다. 또 개성공단에 출입하는 한국의 인력(人力)을 수시로 차단하며 '인질'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관계개선을 도모하려는 외교적 전술이 아니다. 지금까지 북한의 김정일 집단이 보여왔던 외교적 능력은 그것이 '벼랑끝 전술'이건, '깡패외교'건 그 나름대로 패턴을 특징으로 했다. 그런데 지금의 북한 처사는 미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얻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걷어차는 듯한, 일탈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일부 해설자들은 북한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는 나머지,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협상의 메뉴를 더 추가함으로써 값을 올리려는 전략으로 애써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바마와 일합(一合)도 견주어보기 전에 선제적으로 취할 태도가 아니며, 대화의 진전 여부에 따라 취해도 늦지 않다는 점에서 하수(下手) 중의 하수다.

결국 북한이 오바마를 상대로 취하고 있는 위협과 공포분위기 조성 전략은 북한의 외교를 총괄하는 두뇌에 고장이 생겼음을 가늠케 한다. 어쩌면 두뇌에 이상이 생겼다기보다 북한 내부의 상황, 즉 심장에 문제가 발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그동안 선군(先軍)정치가 북한의 통치모드로 확립된 가운데서도 되도록 '대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왔던 북한의 군부가 근자에 텔레비전 등에 세 차례나 직접 '군복'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점을 우리는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①북한이 과연 대내외에 과시한 대로 미사일을 쏠 것인가와 ②발사 이후 미국이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북한이 마지막 단계에서 미사일 발사를 중지할 '묘수'는 아직 남아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은 과시하고 미국의 화해 내지 대화노력에 극적으로 부응하면서 허(虛)를 찔러 세계의 이목을 끄는 고도의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 경우, 미국과 북한의 협상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그것도 북한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될 것이다. 미·북의 급속한 정상화는 한국내 친북좌파를 기승하게 하는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한 뒤에도 미국이 그 제재에 미온적일 경우, 우리가 취할 태도는 참 어렵고 찜찜하다. 한때 북한 미사일 '요격'을 거론해오던 미국 정부에서 요즘 '요격' 얘기가 쑥 들어간 점, 데니스 블레어 군사정보국장이 '인공위성 발사체'라는 데 힘을 보태준 점이 심상치 않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북한 제재를 결의한 유엔 1718호를 가동하는 데 과연 적극적일지에 관해서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럴 경우 이명박 정부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미국과의 공조없이 독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 별로 없고 국내의 대북지원 압력은 더욱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의 상황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원칙론 때문이라는 좌파들의 선전공세가 드세질 것이다.

그러나 마지노선(線)은 있다. 우리는 북핵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어떤 타협에도 동의할 수 없다, 북핵제거의 대가를 한국이 전담하는 상황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을 분명히 그으며 6자회담 탈퇴의 배수진까지 쳐야 하는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6자회담은 미·북의 양자 접근을 가려주는 위장막일 뿐이며, 한국이 아무런 실속없이 그 위장막의 한자락을 언제까지 맡고 있어야 하는지도 이제는 점차 불확실해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