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칼럼·조선일보/2016 년도

보수 정치의 고난(2016.10.25 )

푸른솔1 2016. 10. 28. 17:49

보수 정치의 고난         2016.10.25


보수 정권 재창출 안되면 '박근혜'도 지워져
이대로라면 14개월 후 정권은 야당으로 넘어가게 돼 있어
청와대·새누리 온통 지리멸렬… 보수 정치의 고난 이미 시작돼


정확히 14개월 후 새 대통령이 탄생하면 박근혜 정권은 사실상 끝난다. 개헌과 상관없이 그렇다. 이 시점에서 박 대통령이 해야 하는 일의 우선순위는 행정적으로는 업무의 마무리이고 정치적으로는 보수 정권의 재창출이다.

남은 기간 박 정권이 국회의 협조를 얻어 기왕의 정책들을 마무리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1%도 없다. 야당들, 특히 민주당은 박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정치적 예의를 접은 지 오래다. 협치의 가능성은 없다. 구원 세력이 되어야 할 새누리당에서도 박 대통령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대통령이 여당을 '수하(手下)'로 여기는데 여당이라고 대통령 앞에 언제까지나 부복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무슨 힘으로 정국을 풀어나갈 것인가 난망하다. 개헌을 제기했지만 그것으로 정국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그 연장 선상에서 정권마저 야당인 민주당으로 넘어가면 박 대통령은 물론 보수적 가치들은 험한 꼴을 겪게 되어 있다. 문재인씨가 이끄는 민주당 친노의 노선은 대북·외교·국방·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가치들을 깡그리 뒤집을 기세다. 따라서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박근혜의 통치는 청문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다시 말해 보수 정권의 재창출이 안 되면 '박근혜'도 지워지게 돼 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마이웨이로 가고 있다. 그가 보기에는 '죄'가 없을지 몰라도 이미 정국의 블랙홀로 번진 우병우 민정수석을 끝까지 품에서 내놓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부하를 아끼는 주군(主君)은 될지언정 더 큰 정치를 위해 꼬리를 내주는 '도마뱀의 정치'는 모르는 것 같다. 측근인 최순실 문제로 온 나라가 스캔들 정국에 휩싸여 있는데도 최씨가 주도한 미르·K스포츠 두 재단을 원칙론으로 옹호하는 것을 보면 그는 혈연인 '친가족'의 비리에는 엄격하면서 주종 관계로 이루어진 '새 가족'의 비리에는 둔감한 것 같다. 자신과 보수적 가치를 공유하는 언론 등 우호 세력의 비판에 각을 세우는 것을 보면 팔과 다리 아픈 것은 느껴도 가슴에 멍드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때마침 정국은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으로 들끓고 있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부각되고 있는 문재인씨가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유엔의 북한 인권 규탄 결의안을 북한 당국에 물어보고 기권 결정을 했다면 그것은 국기 문란 행위다. 문씨는 이런 내용의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일절 '묻지 마'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그의 소신과 당시 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국민의 처지에서 그의 자질을 가늠하고 다음 정권의 대북 기조를 조명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럼에도 이 사안은 청와대발(發) 비리 의혹에 묻혀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다. 문씨는 여권이 최순실 사태로 옆길로 빠진 사이 "종북 공세에 끝장 볼 것"이라며 오히려 역공세로 나섰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는 데 반드시 '색깔'을 따져야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인데도 그는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여권은 '호재(好材)'를 갖고도 역공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니 여권 내에서 '정권을 헌납하는 꼴'이라는 자탄이 나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자신의 무고함을 강변하고 깨끗함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 현실은 박 대통령의 처신과 선의와 애국심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야당이 청와대의 고지를 점령했는데 박 대통령이라고 자신이 판 '참호' 안에서 온전할 수 있을 것인가?

박 대통령의 문제는 그를 보좌하거나 지지하는 세력들에도 있다. 청와대 참모들과 내각 중신(重臣)들은 과연 지금 박 대통령이 가는 방향이 옳다고 믿는 것인가. 아니면 알고도 가만히 있는 것인가? 그들은 '박 이후' 나라가 어떻게 되든, 박 대통령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인가? 친박 세력 또는 청와대 외곽 집단들은 다음 정권의 향배에 따라 박 대통령의 이미지가 추락하고 보수의 의지가 약화될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가? 박 대통령을 감싸면 애국이고 박 대통령을 비판하면 모두 반국가이고 친야당이란 말인가? 요즘 SNS에 들어가 보면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의 대립보다 '박 비판'에 대한 매도와 저주가 판을 치고 있음을 본다. 글 쓰는 사람들에게 전에는 '친노'가 무서웠는데 요즘은 '친박'이 더 무섭다.

언론의 정도(正道)는 시시비비다. 보수 언론이라고 보수 정권의 비리에 눈감을 수 없고 좌파 언론이라고 무작정 야당 지지일 수 없는 것이 언론인의 숙명이다. 언론의 색깔은 그 언론이 지향하는 이념과 가치를 반영할 뿐 보도에 있어 정권에 불리하다고 문제를 축소하거나 덮을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 보수 진영은 청와대, 정부, 새누리당 그리고 언론까지 온통 지리멸렬이다. 이대로라면 14개월 후 정치의 판은 야당으로 넘어가게 돼 있다. '포스트 박(朴)'과 보수 정치의 고난은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