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칼럼·조선일보/2015 년도

나쁜 '甲질', 좋은 '甲質'(2015.01.20)

푸른솔1 2015. 1. 26. 14:07

나쁜 '甲질', 좋은 '甲質'       2015.01.20

땅콩 회항 후 甲은 동네북 되고 사회 전체를 甲乙 구도로 인식
甲은 해야 할 책임·의무 있는데 잠재적 '갑질犯' 취급에 위축되면 제 역할 못하고 무력화 될 수 있어
배려만 바라는 乙의 일탈도 문제

 

요즘 시중(市中)의 화두(話頭)는 '갑(甲)질'이다.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 이후 우리 사회의 이른바 '갑'은 동네북 신세다. 사전적(辭典的) 의미의 '질'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반복되는 행위(삽질·딸꾹질·못질), 둘째는 직업적 의미(바느질·낚시질·선생질), 그리고 나쁜 행위(삿대질·욕질·노략질·서방질)의 의미가 그것이다. 지금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갑질의 질은 세 번째의 나쁜 의미로 쓰이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갑질'은 돈 좀 있다고, 권력 있다고, 상대적으로 나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교만하게 굴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등의 행위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고 있다. 그런 따위의 갑질은 사회의 악(惡)이다. 당연히 규탄돼야 하고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는 과도기 탓인지 제 분수(分數)를 모르고 또는 제 분수만을 믿고 남을 무시하고 깔고 앉으려는 인종들이 있다. 그것도 제 힘으로 얻은 분수도 아니고 부모 덕에 '은수저 물고' 태어난 족속들의 노는 꼴이 더욱 가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의 공분(公憤)을 살 그런 따위들이 간혹 눈에 띈다고 해서 그 숫자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갑(甲)들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런 전제 아래 최근 몇 건(件)의 사건을 가지고 우리 사회 전체를 '군림하는 갑'과 '고개 숙이고 사는 을(乙)'의 구도로 단순화하는 것은 비약적이다. 그것은 자칫 우리 사회를 가진 자와 없는 자, 힘센 자와 힘없는 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양분하는 계급론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위험성을 띠고 있다.

그런 접근 방식은 우리 사회의 갑(甲)을 무기력화시킬 수 있다. 어느 사회든, 어느 조직이든 갑에게는 갑의 기능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있다. 사회에는 지배층이 있고 피지배층이 있다. 군대에는 장교가 있고 병(兵)이 있다. 학교에는 선생이 있고 학생이 있다. 회사에는 상사가 있고 직원이 있다. 가정에는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다. 지배층·장교·선생·상사·부모에게는 그 조직을 이끌어 갈 책임과 의무가 있다. 모든 갑이 '갑질'의 잠재적 행위자인 양 치부되면 주눅이 든 갑은 갑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자칫 상사가 입 다물고, 장교가 눈치 보고, 교수가 고개 숙이고 사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동시에 을(乙)의 일탈을 불러올 수 있다. 을에 대한 배려의 강조가 오히려 을의 자만(自慢)을 유발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게임에 몰두한다고 아버지로부터 뺨을 맞은 초등학생이 아버지를 폭행으로 112에 신고하는 사례나 각종 서비스업 현장에서 주객(主客)이 전도된 듯한 사례, 골목길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을 나무라다가 폭행당한 노인의 경우, 시험 성적을 올려주지 않는다고 교수를 '성추행'으로 고발하는 사례 등은 을(乙)의 '갑질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갑질만이 문제가 아니다. '을질'도 문제인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갑과 을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인성(人性)에 관한 문제이고 교육에 관한 문제다. 사람이 덜된 나쁜 갑도 있고, 나쁜 을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굳이 '가해자 갑'과 '피해자 을'의 구도로 파악할 일은 아니다. 사회는 갑과 을의 균형 잡힌 조합과 슬기로운 조화로 엮어진 유기체이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거나 저항하는 대립 구조가 아닌 것이다.

일을 잘못 처리한 직원이 상사로부터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을 때 그것을 '갑질'로 보고 분노하고 저항하는 데 그친 경우와 그 모욕을 각고의 노력으로 극복하고 성공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갑질은 받는 사람에 따라 '질'이 되기도 하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을의 위치를 배려한다고 캐디를 '코치님'으로, 종업원을 '○○○님'으로 호칭하다가는 언젠가 우리는 껍데기 과잉의 세상으로 갈 것이다. 갑과 을은 고정된 것도 아니다. 과장은 대리의 갑이지만 부장에게는 을이고, 회사의 평직원인 을도 가정에서는 갑이 된다. 이처럼 역할에 따라 바뀌는 갑을의 구조에서 어떤 희열을 느낄 이유도, 어떤 모멸을 느낄 필요도 없다.

바람직한 것은 우리가 굳이 사회를 갑과 을의 단순 구도로 양분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선진 사회에서는 사회를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높은 자와 낮은 자, 힘센 자와 힘없는 자로 양분하지 않는다. 사회 통합도 부족한 마당에 이리 가르고, 저리 자르고, 쪼개는 분파적 접근은 해악적이다. 갑질의 몇 케이스를 확대해 갑에 대한 분노의 표출로 피해의식을 보상받으려는 심리는 퇴행적이다.

갑질을 좋은 의미의 질(質), 즉 퀄리티(Quality)의 의미로 재해석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갑질(甲質)을 더욱 생산해 가야 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