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인 혼자(?) 하는 人事( 2013.01.21)
당선인 혼자(?) 하는 人事 2013.01.21
국무총리·장관 등 고위직 인사는 잘못될 경우 정부에 큰 악영향
정보 누설 두려워 '밀봉'한다면 공정성과 국민 동의 확보 어려워
대통령 임명권은 '불가침' 아냐… 영화제처럼 현장 개봉 안될 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주문(注文)이 여기저기서 봇물 쏟아지듯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복지 공약과 그 우선순위의 문제, 재원 조달 문제, 정부 조직 개편 문제, 대북문제 등은 우리의 미래에 관한 중요한 정책적 사안이라서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국무총리 등 고위직 인사에 관한 사항이다. 다른 문제들은 박 당선인 측 설명대로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후에라도 충분한 논의를 거쳐 정(定)할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는 성격의 것이다. 하지만 인사는 다르다. 인사는 한번 정해지고 나면 속된 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후에 하자가 발견돼 국회 인준 과정에서 틀어지기라도 하면 새 정부의 공신력도 추락하고 업무에도 지장이 생길 뿐 아니라 새 대통령의 통치력과 이미지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어 국무총리를 상정(想定)해 볼 수 있다. 박 당선인이 비밀주의에 너무 철저한 나머지 새 국무총리 지명자를 여론 검증 과정 없이 밀봉(密封)된 봉투를 뜯어 발표하는 식으로 했다고 하자. 그 인물에 대해 조야(朝野)는 물론 국민 사이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사태는 꼬이기 시작한다. 특히 지명자에 대해 그동안 검증되지 않았던 사항들이 드러나고 여기저기서 불미스러운 사실들이 추가돼 문제가 인사청문회로 비화한다면 새 대통령의 체면과 위신은 말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총리뿐 아니라 박 당선인이 새로 무게를 둔 경제부총리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은 그중 하나만 낙마를 해도 새 정권은 출범부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새 정권의 기둥이 될 참모진이 임명 과정의 비밀주의로 인해 불신과 불통의 제물이 된다면 이것은 사후에 수정이 가능한 정책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참사로 귀결될 우려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수전 라이스 유엔 주재 대사를 제2기 국무장관 후보로 내정했다가 철회한 것은 좋은 본보기다. 미국 대통령은 새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 국장 정도는 미리 내정자를 거의 공개적으로 언론에 흘린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그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교환되고 찬반론이 벌어진다. 라이스 대사는 특히 중동문제에 관한 그의 정책적 입지(立地)로 인해 적합성에 의문이 제기됐고 오바마는 결국 그의 내정을 철회하고 애당초 국방장관으로 내정했던 존 케리를 국무장관에 지명했다.
미국의 백악관은 인물뿐 아니라 정책에서도 여론을 떠보기 위해 주요 언론에 특종을 주는 식으로 흘린다. 백악관 당국은 그 기사가 나간 뒤 여론의 추이를 살핀다. 백악관에 걸려오는 찬반 전화도 중요한 자료로 삼는다. 그래서 여론이 찬성 쪽으로 우세하면 그 정책을 부상(浮上)시키고, 반대가 많으면 "우리는 그런 정책을 구상한 적이 없다"며 시치미를 떼버린다.
인사 정보가 새 나가면 여기저기서 잡음이 생기고 엉뚱한 반발과 압력이 들어오며 대상 인물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전래적인 정치 문화가 개방형이라기보다 밀실형이고, 그런 것이 주종(主從) 관계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드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또 우리의 임명권자는 인사를 자신의 고유 권한 또는 특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가타부타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대통령은 기껏 내정했던 사람도 정보가 새자 아예 바꿔버린 적도 있다.
대통령의 임명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것이지 대통령 마음대로 하는 불가침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또 인사 정보가 누설되는 데서 오는 부작용보다는 인사의 공정성, 합리성, 국민 동의성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식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런 애꿎은 이론이나 논리를 떠나 인사가 잘못됐을 때 대통령이 입게 되는 정치적 타격을 고려해야 한다. 국민적 신뢰의 훼손, 독불장군적 이미지 그리고 여타 공직자들의 외면 내지 비협조라는 문제가 따른다.
'밀봉된 봉투'는 일견 신선하고 깨끗해 보인다. 누구도 모르게 신분 상승이 이뤄지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혜성처럼 인물이 부각되는 과정이 그렇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부럽고 멋져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 나라 국무총리의 이름이 무슨 영화제나 연기 시상식에서 개봉되는 봉투처럼 불릴 수는 없다. 임금이 내리는 칙서를 감읍하듯이 받는 식으로 연출돼서도 곤란하다. 그것이 임명권자의 오기(傲氣)로 국민에게 비칠 때 그 인사는 국사(國事)가 아니라 망사(亡事)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