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앞서 '고위급 회담'부터( 2010.02.07 )
'정상회담' 앞서 '고위급 회담'부터 2010.02.07
남북정상회담 추진에서 김정일 의도는 숨어있고
MB 태도만 확대 연출돼 우리가 안달이 난 인상…
회담 서두를 이유 없어, 北 내부 사정 파악부터
지금 북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여러 징후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방북해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지 4개월 만에 또다시 중국 대북 창구의 최고위층인 왕자루이(王家瑞)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평양을 방문하고 있는 것부터 이례적이다. 김정일의 방중설도 여전히 살아있다. 두 나라 간에 이 같은 빈번한 고위층 접촉은 긴급히 그리고 긴요하게 협의하거나 설득하거나 요구하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내부의 상황도 예사롭지 않다. 화폐개혁의 실패에 따른 인사소동, 시장(市場)세력의 저항에 대한 당국의 강압조치, 마지막 고비로 치닫고 있는 식량부족사태와 기근으로 인한 아사자의 속출 등은 북한 내부가 흔들리고 있고 김정일의 장악력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북의 대남(對南) 전선(前線)에도 혼선이 생긴 것 같다. 한쪽으로는 금강산과 개성의 관광을 재개하고 개성공단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등 '대화'를 던지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서해안에서 연일 해안포를 쏘아대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중성,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 내부적으로 군(軍)과 당(?) 간의 이견과 마찰의 결과로 볼 수도 있고, 일부러 그런 헷갈리는 작전을 써 자신들의 내부문제를 위장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前) 미국 대북특사 잭 프리처드는 지난 5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한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던 북한이 "10월(2009년)이 되자 모든 것을 바꿨다"고 주장했다. "두번째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결의와 한·미 양국이 보여준 결연한 태도가 잠시나마 평양을 움츠러들게 했다.…(그러나) 11월에 내가 방문했을 때 북한 정부는 마치 새 생명을 공급받은 듯했고 어떤 절박함도 보이지 않았다. 짧은 기간에 이렇게 태도가 변한 것은 북한이 원 총리의 방문으로 중국의 도움과 암묵적인 보장을 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북한의 태도변화는 중국의 태도변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중국은 미국에 화가 나 있다. 인민폐 환율에 대한 미국의 압박, 오바마의 달라이라마 접견,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 첨단 해군력 경쟁 등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와 마찰현상은 중국으로 하여금 대(對)북한문제에 어깃장을 놓게 하고 북한과 북핵을 대미관계에서 지렛대로 이용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에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미·중 간의 불화와 함께 후텐마 기지 이전을 둘러싼 미·일 간의 마찰은 당연히 한반도의 안보환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며 북한은 이것을 타고 또다시 '줄타기 외교'로 원대복귀했다고 봐야 한다.
이런 마당에 한국에서는 남북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진원지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 1월 말, 그것도 해외 여행 중에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준비가 항상 돼 있다. 아마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고 귀국 직후 국무회의에서 "정상회담을 위한 대가는 있을 수 없다는 대전제하에 남북 정상이 만나야 한다. 이 원칙을 양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 안달이라도 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서둘 이유는 없다. 지금 우리는 북한 내의 사정과 한반도 주변 안보정세의 변화로 볼 때 당분간 대북문제에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언젠가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하다 해도 지금이 그 시기는 아니다. 그래도 손놓고 앉아 있을 수 없어 굳이 무엇인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싶다면 정상회담에 앞서 고위당국자회담을 먼저 열 것을 제안하고 싶다. 지금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남북 막후접촉을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하는 셈이다. 거기서 핵 문제, 국군 포로와 납북자 송환문제, 이산가족상봉의 정례화문제, 관광과 안전보장문제 등을 상세히 논의하고 정상회담으로 가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