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평화와 용서를…(101220)
종교계, 평화와 용서를… 2010년 12월 20일
불교계가 이명박(MB) 정부와 여당에 대해 심기가 불편해졌다. 국회 예산 심의에서 불교계가 바랐던 ‘템플 스테이’ 예산이 대폭 깎인데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예산 지원 반대 기도회를 열고 사찰 마당에 들어와 지신을 밟는다며 소동을 부리는 등 불교계를 욕보였다는 심정적 분노가 쌓여서다. 대통령이 개신교 장로라는 추론적 이유보다는 MB 정부 집권 이후 이런저런 기독교 편향적이고 반(反)불교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는 인식이 깔린 탓이 크다고 보여진다.
오해든 아니든 그런 정서가 생겨난 건 사실이다. 불교계 지원 예산이 깎인 직후 ‘누구누구 출입금지’라는 방(榜)을 붙이고, 찾아온 진사(陳謝) 사절을 문전 박대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정치권과 종교계 지도 그룹이 얼굴 붉히며 맞선 모습을 봐야 하는 불자들이나 국민들의 심기도 덩달아 편치 않다. 더구나 가톨릭교계까지 추기경에 대한 하극상의 험한 말들이 오가는 균열을 보이면서 이 전쟁 불안, 경제 위기 속에 종교 지도자들까지 왜 이러시느냐는 걱정과 불만이 생겨나는 것이다. 절에 들어와 지신 밟고, 지도에서 절 빼는 것까지는 그나마 참아 줬는데, 주겠다고 약속했던 예산마저 안 주니 불교계를 뭐로 보느냐는 불편한 심기가 되는 건 사바의 중생들도 이해할 수 있다.
종교 지도자는 생각의 깊이와 크기가 달라야 한다. 난방비가 깎인 차가운 경로당, 밥 굶는 결식 아동들의 문간에는 ‘예산 잘못됐으니 죄송하다’고 찾아오는 사람은커녕 그림자조차도 없다. 그들이라고 서운함이나 분노도 못 느끼는 감정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도 그들은 말없이 참고 있다. 다툼과 미움과 보복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큰 절, 높은 교회 안에 앉아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낮은 곳에서 부처님과 하느님께 심판을 맡기는 그들의 침묵의 기도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정부가 템플 예산을 줬더라도 오히려 그 돈, ‘경로당과 결식 아동 예산에 돌려 쓰라’고 해야 할 분들이 종교 지도자다. 정치인과 돈 문제로 다투고, 문을 닫아걸어 ‘한번 붙어보자’는 식으로 맞서면 힘없고 약한 민중은 어느 곳에 마음 기댈 곳을 찾아야 하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모욕을 참음으로써 분노를 이기고 선(善)한 마음으로 악(惡)함을 이겨라. 승자(勝者)는 보시(布施)할 줄 알고 지성(至誠)은 거짓을 이긴다.’ 약속 깨고, 지신 밟으며 모욕 줄 때, 인내로 그 모욕을 이기면 참 지도자다. 보시할 줄 알아야 진정한 승자가 된다고 하신 뜻 또한 쌀이나 양초만이 보시가 아니라 나를 욕보이고 무시한 자에 대한 용서, 끌어안는 화합, 내가 받을 것을 더 약한 자에게로 돌려주는 것이 진정한 보시임을 말한다. 도량의 지도자가 정치하는 자들과 똑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불교계에서 그런 승자의 큰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늦게나마 구차한 예산 안 얻겠노라 한 건 잘한 결단이다.
또 하나, 천주교계의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사람들을 보자. ‘정구사단’은 좀 비판적으로 말하면 친좌파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느낌을 주어온 비공인 모임이다. 왼쪽으로 기울어져 보인다고 해서 그들의 주장이나 언행들이 다 나쁘거나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추기경을 향한 언어 폭력은 옳지 않다. 정의가 아니다. 그들이 하천 개발의 과학적, 환경적, 토목학적 이론과 연구 검증 지식을 얼마만큼 갖췄는지는 모르나 종교인이 강물 얘기에 투쟁적 모양새로 끼어드는 것부터가 일단은 공감대가 좁다.
나는 새는 공중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듯 사제(司祭)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흔적만을 대중의 마음속에 남기고 심어줘야 한다. 성경을 덮어둔 채 거리에 나서 촛불이나 들고, 웃어른에게 언어 폭력을 가하며 거친 흔적을 뿌리는 것은 종교인의 정의가 아니다. 정작 그들이 ‘구현’해야 할 것은 이 차가운 날씨에 얼어붙은 대중의 마음을 녹여 주는 평화와 용서의 기도다. 더욱이 오늘내일,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마당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