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발과 정치인의 입(100301)
여왕의 발과 정치인의 입 - 2010년 03월 01일 -
여왕 폐하 만세.’
미국 NBC(동계 올림픽 주관 방송사)가 김연아에게 보냈던 찬사다.
그 찬사 이후 내리 사흘 동안 대한민국은 ‘행복’했다. 겨울 바닷바람 같은 상쾌한 승리감의 여운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그런 흥겨움 속에 지난주 내내 ‘여왕’의 금메달 스토리가 빼곡히 실린 신문들을 펼치면서 대다수 국민들은 입속으로 한 번쯤 이런 넋두리를 했으리라 짐작된다.
‘어린 세대들, 참 장하고 대단해. 이제 정치만 좀 잘하면 우리나라도 괜찮은 나란데….’ 밀쳐둔 신문을 다시 펼쳐 보노라면 정말 그렇단 생각이 든다. 1면 톱(TOP)기사에서부터 시작해 3~4면(面), 많게는 5~6페이지까지 여왕과 젊은 메달리스트들의 쾌거 기사로 뒤덮여 있는 신문을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마치 내 자식, 내 동생들이 이뤄낸 자랑거리처럼 기분이 좋다. 그러다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벌레 씹은 기분이 된다. ‘교육감 뇌물 의혹’ ‘자율고 부정 입학 소송’ ‘남한 주민 입북(入北) 조사’ ‘친박 친이 세종시 입씨름’…. 하나같이 어른들 세계의 얼룩진 모습들이다.
그래서 A신문의 사진기사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끈다. ‘여왕 폐하’의 발바닥 사진이다. 온통 주름살과 오목오목 흉터가 파인 자국들, 그리고 굳은살투성이의 발바닥. ‘피땀이 만든 주름’이란 제목이 붙은 여왕의 발은 딱딱한 피겨 부츠를 오래 신은 탓에 새끼발가락은 아예 발바닥 안쪽으로 밀려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19세 소녀의 발이라기엔 너무나 안쓰러운 바로 그 발이, 인내와 피나는 땀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고 국격(國格)을 빛냈다. 입으로만 하는 애국, 권력욕을 숨긴 위선(僞善)의 애국에 능숙한 (일부)정치꾼들의 반들반들한 입술보다야 얼마나 더 아름답고 믿음직한 여왕의 발바닥인가.
때마침 오늘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보내는 3`1절이다. 정치인들의 입으로 하는 극일(克日), 독도 사랑보다 어린 여왕의 발바닥이 이뤄낸 극일이 훨씬 더 신나고 통쾌해서다. 일제강점기 동안 아사다 마오의 선조들에게 당했던 민족의 수모를 우리의 어린 여왕이 후련하게 풀어준 듯한 주말이었다. 극일과 세계화의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 소녀들이 써 내린 역사들은 모두가 위대했다.
이제 ‘동계 올림픽’ 하면 ‘여왕 김연아’라는 연상 효과가 국민들 가슴에 입력돼 버렸듯이 ‘3`1 독립 만세’ 하면 바로 떠오르는 ‘유관순 누나’ 역시도 역사가 기억하는 16세의 어린 소녀였다. 유관순과 똑같은 나이에 함경북도 길주(吉州)땅에서 똑같은 농군의 딸로 독립 만세 시위를 선도하다 역시 똑같은 나이에 일경에게 피살된 소녀 동풍신(童豊臣)도 마찬가지 어린 소녀였다.
오늘 또다시 3`1절을 맞아 되새길 것은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일본을 누른 소녀 세대의 빛나는 승리가 던진 민족의 자긍심과 투혼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어제는 건국 이후 최초로 대구의 고교생들이 독재 정권에 항거해 일어났던 2`28의거 5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3`15 와 4`19로 이어져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의 뿌리를 심는 값진 역사로 기록됐던 대구 2`28의거는 지난 2월, 50년 만에 드디어 이 나라 민주운동의 효시(嚆矢)라는 자랑스런 법적 공인(公認)을 받아냈다.
앞선 어른 세대는 그러한 영광된 역사를 썼고, 앞으로 더 많은 빛난 역사를 만들어 나갈 청소년 세대를 위해 그들을 북돋우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한 역사 승계의 소명 앞에서, 뇌물 먹은 의혹으로 수사나 받는 장학사`교육감의 입,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을 이념 교육으로 염색시키려 드는 정치 교사들의 입, 권력투쟁의 입씨름으로 날 새는 소수 정치꾼들의 입은 참으로 부끄러운 입이다. 앞으로의 국가 역량은 세계를 누비며 뛰고 배우는 젊은 세대에 쏟아 밀어 주어야 한다.
3`1 정신이든 2`28민주화운동 정신이든 올림픽의 영광이든, 승자(勝者)의 역사를 이어갈 주체는 물신(物神)과 권력에 집착된 정치 세대의 입이 아니라 바로 세계를 상대로 뛰고 있는 어린 여왕 세대의 주름진 발바닥인 것이다.